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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부분)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문장들

김훈의 산문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비슷합니다. 문장은 단정하지만, 그 문장이 가리키는 세계는 늘 복잡하고 깊습니다. 『라면을 끓이며』 역시 일상의 가장 사소한 행위에서 시작해 인간, 노동, 자연, 몸, 그리고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근원을 천천히 건드리는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무엇을 더 얻으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자연이 자연이 아닌 이유

김훈은 과수농업과 축산업, 양식업이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1차 산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보다는, 공업적 생산 방식에 가깝다는 지적입니다. 조류독감이 돌 때 철새들은 일부만 죽지만, 양계장의 닭들은 예외 없이 ‘싹’ 죽는다는 대목은 섬뜩하면서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차이와 독자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기계처럼 작동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듯 느껴졌습니다.

“그 나무들은 나무가 아니라, 사과나 포도를 뽑아내는 기계처럼 보인다”는 문장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조용히 묻는 것 같습니다.

 

삶을 지속하려는 자만이 연장을 만든다는 말의 의미는?

신석기시대의 어로와 지금의 어로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김훈의 문장은 인간의 노동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습니다. 먹이를 던져 더 큰 먹이를 낚고, 몸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고단하게 하는 일. 그 과정에서 연장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느껴졌습니다.

“삶을 지속하려는 자만이 연장을 만든다”는 글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와 기술 역시 같은 질문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속하려 애쓰고 있는지, 그 지속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됩니다.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관찰의 노동일까?

김훈에게 여행은 쉼이 아니라 노동에 가깝습니다. 그는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합니다. 롱샷으로 풍경을 넓게 보는 망원경과, 하나의 포인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망원경을 동시에 가지고 다닌다는 말이 그의 문체와도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김훈의 글은 언제나 멀리서 전체를 보다가도, 갑자기 한 사물, 한 장면으로 깊숙이 파고듭니다. 그 시선 덕분에 글을 읽으며 세계를 피상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은 왜 우리에게 냉정하게 느껴질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 중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윽하거나 유현하지 않고, 늘 자기 자신의 볼일로 바쁘며 인간에게 냉정하다는 말.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느낀다는 통찰을 오래 곱씹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감상과 위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처럼 다가왔습니다.

 

한 줄의 끈이 인간을 어디까지 연결했을까?

암벽등반에서 톱과 세컨드를 연결하는 자일의 이야기는 이 책의 백미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뒤로 늘어진 밧줄이 톱의 앞길을 받쳐준다는 설명은 인간관계와 협력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비유처럼 느껴졌습니다.

김훈은 끈과 밧줄을 발견한 인류를 ‘위대한 선구자’로 부릅니다. 끈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지 않지만, 인간의 몸과 노동을 다른 인간과 외계로 확장시킨 결정적인 도구였다는 해석이 놀랍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연결의 힘이 이 한 줄의 끈에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진부한 일상이 경건한 이유는?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이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처럼 느껴졌습니다. 눈부신 행복이나 극적인 기쁨이 없어도, 하루하루 무사히 반복되는 삶의 순환 자체를 행복으로 삼겠다는 작가의 고백은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삶은 성취보다 견딤에 가깝고, 완성보다 지속에 가깝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왜 김훈의 산문이 소설보다 더 깊게 다가올까?

김훈은 자신의 글쓰기를 낮추어 말하지만,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멀리 뻗어 나갑니다. 아내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신라 무덤 속 여인의 화장품으로까지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줄의 끈에서 인류의 확장을 떠올리는 통찰, 사물 하나에서 세계 전체를 유추해 내는 시선 덕분에, 저는 소설보다 김훈의 산문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으로, 과장 없이 직접적이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길잡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라면을 끓이며』는 화려한 위로나 즉각적인 해답을 기대하는 분보다는, 일상의 무게를 그대로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라면을 끓이는 짧은 시간처럼 사소한 순간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생각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산문집은 오래 곁에 두고 읽게 될 책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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