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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부분)

 

허송세월은 낭비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왜 불안할까요? 우리는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쉬는 시간조차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훈의 『허송세월』을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헛되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사실은 가장 충만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햇볕을 쪼이는 시간을 통해 ‘지금’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미래의 시간은 당길 수 없기에 결국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이렇게까지 깊이 느끼게 만드는 문장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햇볕을 쪼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책 속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햇볕을 쪼이는 순간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작가는 햇볕을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생성되는 현재의 빛’으로 바라봅니다.

“햇볕은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이 문장을 읽으며, 우리가 흔히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며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오직 현재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햇볕은 언제나 현재에만 존재하고, 그 현재를 온전히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감각과 가장 가까운 경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또한 햇볕을 쪼일 때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묘사는 단순한 감각을 넘어 존재 자체가 열리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역할도, 책임도 없이 그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가로막고 살아갈까?

책을 읽으며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차단막’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개념, 언어, 기호 같은 것들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만’ 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름 붙이고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마주 보는 거울 두 개의 저편으로 언어의 허상은 무한대로 전개된다.”

이 문장은 읽는 순간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개념들이 사실은 끝없이 반복되는 정의의 구조 속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허송세월은 정말 헛된 시간일까?

책의 제목인 ‘허송세월’은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오히려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이 문장을 읽으며, ‘바쁨’의 의미가 뒤집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산적인 일을 할 때 바쁘다고 느끼지만,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통해 오히려 더 깊이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햇볕을 쪼이며 보내는 시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지만, 내면에서는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열리고 감각이 깨어나고, 존재가 확장되는 경험은 바쁜 일상 속에서는 오히려 느끼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가?

『허송세월』을 덮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만 흔들리고 있는가.

이 책은 어떤 해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남기는 책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오래 남아서 일상의 태도를 조금씩 바꾸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잠깐이라도 햇볕을 쬐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볼 계획입니다. 특별한 깨달음이 생기지는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설명하려 하지 않고 느끼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 경험 자체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허송세월』은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설명되지 않는 감각, 그리고 언어로 붙잡히지 않는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헛되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사실은 가장 본질적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애쓰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지금’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허송세월 검색
김훈 (지은이), 나남출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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