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명: 받아쓰기
- 저자: 김유진
- 출판: (주)난다, 2017

이 책은 서부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찾으러 가던 길, 책꽂이 사이에서 시선을 붙든 책.
처음에는 여행지에서 그림 그리고 글을 쓴 책인가 싶어 펼쳐보았지만, 알고 보니 작가는 일기를 쓰고 그림은 다른 사람이 그렸다고 합니다. 유화 스타일의 그림과 함께 읽는 일기가 묘하게 부드러운 리듬을 만들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이 곁들여진 일기는 문장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고, 감정에 천천히 머물 수 있게 해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받아쓰기』라는 제목은 저자가 서점에서 찾았던 다른 작가의 책 이름이었지만, 어쩌면 이 책이 타지에서의 시간을 또박또박 받아 적으며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이오와 레지던스에서의 기록, 왜 특별하게 느껴졌을까?
2015년 8월부터 11월까지, 작가는 미국 아이오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처음 가 본 타지에서의 생활은 기대만큼이나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와 적응의 시간을 동반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 시기의 생활 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낯선 땅에서 자신을 붙들어야 했던 한 창작자의 기록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으며,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공간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목차가 하루도 빠짐없는 날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건너뛰지 않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그 시간의 밀도를 짐작하게 해 주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마치 그 계절을 함께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글쓰기와 음악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음악과 창작에 대한 작가의 습관이었습니다.
“나는 안토니오가 하나의 작품을 쓸 때 한 종류의 술을 고르는 것처럼 글을 시작하기 전, 음악을 찾는다. (…) 한번 쓰인 음악은 다시 쓰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은 그에 걸맞은 하나의 곡과 짝을 이룬다.”
이 문장을 읽으며 창작이란 결국 ‘의식’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작품에는 하나의 음악. 이미 사용한 음악은 다시 쓰지 않는다는 원칙. 노트북 폴더에 작품 제목 옆에 곡명을 함께 적어 둔다는 이야기까지.
마감에 쫓기면서도 음악을 찾느라 며칠씩 허비한다는 고백에서는, 완벽한 시작을 기다리는 창작자의 고집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글을 쓰기 전에 분위기를 정리하려 애써본 적이 있어 더 공감이 되었습니다.
혹시 나도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나만의 의식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매해 가을마다 다시 찾는 영화, 왜 반복하게 될까?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 본 영화 <토니 타키타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 합니다.
작가는 2005년 가을에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고 회상합니다. 종로 시네코아에서 영화를 보고, 맞은편 라면 가게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돌아온 기억. 지금도 그곳들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적은 문장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 매해 가을이면 〈토니 타키타니〉를 다시 찾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반복’이 지니는 힘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정한 계절에, 특정한 작품을 다시 만나는 일.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시간을 확인하는 방식 같았습니다.
그런 작품이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가을이면 떠오르는 영화, 비 오는 날이면 펼쳐보는 책 같은 것이 있어도 좋겠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낯선 나라가 더 이상 멀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뉴스 속 세계 도시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텔아비브, 아르메니아, 상파울루, 스톡홀름. 뉴스를 들으며 아이오와에 함께 머물렀던 작가들의 얼굴이 국가대표처럼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그 문장을 읽으며, 세계가 지도 위의 점이 아니라 ‘누군가의 얼굴’로 바뀌는 경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그들 나라’가 아니라 ‘누군가의 나라’로 바뀌는 순간. 그곳은 아주 먼 곳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멀지 않은 곳이 된다는 표현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도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주는 의미는 이런 연결감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창작이라는 공통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경험. 그것이 이 일기를 통해 조용히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낯선 곳에서 나를 받아 적는 시간
『받아쓰기』는 화려한 사건이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고독, 창작의 습관, 반복되는 영화,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 같은 조용한 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 역시 제 일상을 받아 적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를 기록하는 일은 나를 붙드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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