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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작가의  『마음을 두고 온 곳, 세계의 구멍가게 이야기』  독서 리뷰

 

1. 왜 우리는 ‘구멍가게’에 마음을 두고 있을까?

이미경 작가의 세 번째 구멍가게 그림책, 『마음을 두고 온 곳, 세계의 구멍가게 이야기』는 오래된 상점의 풍경을 그리고 기록한 책이지만,
작가의 말처럼 “사라지는 것들의 존엄”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려는 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작가는 아크릴 잉크를 펜촉에 찍어 ‘셀 수 없는 가는 선’으로 그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선 하나하나가 마치 “기억의 결” 같았습니다.
그 선들이 모여 벽돌이 되고, 간판이 되고, 바람이 됩니다.
화려한 색감보다 시간이 만든 흔적과 빛의 리듬이 더 오래 남는 그림들입니다.

책을 펴고 처음 만나는 그림. 마치 이파리 개수를 하나 하나 센 것 같다

2. “같지 않지만 어울린다”는 말의 아름다움

책 속 한 구절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형질이나 종이 달라도 닮아 갈 수 있다. 같지 않지만 어울린다는 뜻이다.”

은행나무와 순흥상회가 “비슷한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한 공간에서 같은 결의 숨을 쉬며 살아가는 풍경.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공존의 미학’ 같습니다.

그림 속 구멍가게들은 모두 낡고 작지만, 그곳엔 시간이 켜켜이 쌓인 따뜻한 리듬이 있습니다.
작가는 이 리듬을 섬세한 선으로 그려냅니다.
은행잎이 떨어지는 노란빛, 다홍색 지붕 위에 스며드는 햇살, 오래된 간판의 희미한 글자들.
모두가 ‘순수한 가을색’처럼 마음에 스며듭니다.

3. 구멍가게는 왜 ‘세계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책 제목에 ‘세계의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붙은 이유는 단순한 공간적 확장이 아닙니다.
지은이는 서울, 교토, 하노이, 파리, 리스본 등 직접 걸으며 발견한 오래된 가게들을 그렸습니다.

다른 지역, 다른 가게를 그렸지만 그림마다 공통된 정서가 있습니다.
작은 가게가 품은 인간의 삶과 온기입니다.
국가나 언어가 달라도 그 공간에는 “손의 온도”가 남아 있습니다.
진열대 위의 유리잔, 문턱의 낡은 나무, 그리고 그 안에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작가는 그런 순간들을 붙잡아 “사람의 결”로 옮겨놓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세계의 구멍가게를 그렸지만,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의 지도 같았습니다.

 

4. AI 시대, 느림의 예술이 던지는 질문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에는 챗GPT를 이용한 쉽고 빠른 이미지 생성이 유행하고, AI 로봇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까지 근접해 그 경계마저 넘나들려 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보폭으로,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도 충분할 텐데···”(140)

작가의 이 말이 단순한 시대적 탄식이 아니라, 창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처럼 들렸습니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수천 번의 손놀림과 호흡”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시간은 대체될 수 없습니다.

‘쉽고 빠름’보다 ‘느리고 섬세함’으로 완성된 그림 한 장.
그 속에는 작가의 시선, 손끝의 떨림, 그리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 느림의 태도야말로,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5. 구멍가게의 풍경이 우리에게 남긴 것

『마음을 두고 온 곳』을 읽으며 느낀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느꼈던 온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가 그린 구멍가게의 창문에는 늘 누군가의 삶이 비칩니다.
한 세대의 기억, 한 마을의 시간, 그리고 한 사람의 마음이 그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나도 그곳에 마음을 두고 온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6. 기억의 선을 따라 그린 마음의 지도

이미경 작가의 구멍가게 시리즈는 평범한 그림책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세계를 위한 시각적 기록입니다.
『마음을 두고 온 곳』은 그중에서도 특히 “감정의 온도”가 짙게 남는 작품입니다.

한 줄 한 줄, 가느다란 펜선으로 이어진 선들은 결국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사랑했는가”를 되묻습니다.
그 선의 끝에는, 여전히 불이 켜진 작은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엔, 우리가 두고 온 마음이 있습니다.

 

책 표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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