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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의 단풍, Procreate app on iPad

 
12월의 서귀포는 늦은 가을 기운으로 가득하다.
바람은 한결 가벼워졌고, 들판의 풀들은 제 몫을 다한 듯 바싹 말라 서걱거리는 소리만 남겼다.
그런 풍경 속에서 뜻밖의 색을 만났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새파랗게 자라기 시작한 유채밭 한 켠, 그리고 그 옆에서 붉고 보랏빛으로 단풍이 든 강아지풀이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계절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며 서귀포 겨울 풍경, 강아지풀 단풍, 유채밭 풍경 같은 단어보다 먼저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풀들이 시들어갈 때, 가장 늦게 색을 내는 존재. 초록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마르는 것도 아닌 그 중간의 찬란함은 오히려 더 눈부셨다. 우리는 흔히 젊음이나 한창일 때의 삶만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이 강아지풀은 말한다. 마지막에도 이렇게 빛날 수 있다고.
말라버린 풀들이 배경이 되어주었기에 강아지풀의 색은 더욱 또렷했다. 인생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상실과 이별, 쇠락의 시간들이 있기에 한 순간의 아름다움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자연 풍경 속에서 이 작은 풀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자신의 시간을 정확히 살아내고 있다. 서둘러 피지도 않았고, 억지로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이 장면을 바라보며 떠오른 문장이 있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삶의 끝이 다가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더 이상 증명할 것도, 비교할 것도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색으로 물든다. 겨울 초입의 강아지풀이 그렇듯, 인생의 마지막도 꼭 초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장 깊은 빛을 낼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서귀포의 겨울 들판에서 만난 이 풍경은 내게 조용한 다짐을 남겼다. 언젠가 나의 계절이 기울 때, 누군가의 배경이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색으로 남고 싶다고. 말라가는 것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답게 아름답고 싶다고.
그래서 이 그림은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지나갈 우리의 시간을 붙잡아 둔 기록이다. 겨울 풍경 일러스트, 자연과 인생 에세이,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마음. 다만 분명한 것은, 끝이 있다는 사실이 삶을 더 빛나게 만든다는 것. 강아지풀이 내게 조용히 가르쳐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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