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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부분)

상실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의 기억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문장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고요한 절망과 따뜻한 생명력입니다.
그중에서도 『내 이름은 태양꽃』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이름 아래, 죽음과 재생, 상실과 사랑의 감정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이 여운으로 젖어드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1. 죽음 이후에도 기억은 남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태양꽃’입니다.
이 꽃은 담 옆 응달진 곳에서 눈을 뜬 존재이지요. 

그래서, 생의 기쁨도 잠시, 곧 양지 바른 곳에서 피어난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다가 자괴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 후 가까운 곳에서 제대로 떡잎을 내지도 못하고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간 어린 생명의 시점을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와 존재의 윤회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상상할 수 있겠니? 땅속에서 눈을 뜨면, 잠깐 동안 보았던 세상의 기억이 얼마나 눈부신지 몰라.”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의 힘입니다.
세상에는 “바람과 냄새, 벌레의 소리, 별과 달”이 있었고, 그것들이 견딜 수 없게 그립다는 고백은 마치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다시는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 위에 놓여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상처를 품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태양꽃』의 또 다른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랑할 수 있다.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모든 폭력과 고통의 세계 속에서도, 가을 아침의 햇빛을. 한 조각의 달콤한 복숭아를. 웃고 있는 아기의 두 눈을, 깨끗한 눈물을.”

한강은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을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제시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가을 햇빛’과 ‘달콤한 복숭아’를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한강이 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가능성 같았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소년이 온다』에서 보여준 한강의 시선이 떠올랐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 상처를 껴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 이름은 태양꽃』은 그보다 훨씬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로, 같은 주제를 다른 결로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3. 한강이 말하는 생명과 시간의 윤회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처럼 단순한 교훈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이라는 순환의 고리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존재로 이어지고, 사라짐 속에서도 기억은 남아 다음 생을 기다립니다.

김세현 작가의 그림도 그런 서정적인 세계를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잿빛과 노란빛이 교차하는 배경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려놓은 듯하고, 빛이 스며드는 장면마다 생명의 미세한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한강의 문장이 언어로 그린 시라면, 김세현의 그림은 그 시를 시각으로 옮긴 또 하나의 언어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꽃’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피고 지는 식물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은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꽃은 짧은 생을 피워내지만, 그 안에 모든 빛과 바람과 향기를 담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삶이 지닌 의미와도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4. ‘어른을 위한 동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

한강의 『내 이름은 태양꽃』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게를 아는 어른이 다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감정 — 슬픔, 그리움, 사랑, 그리고 용서 — 들이 한 문장 한 문장 속에서 다시 피어납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모든 것을 우리 앞에 펼쳐 주는 시간”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삶이란 어쩌면 그런 모순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너짐 속에서 피어나고, 상실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시간.
『내 이름은 태양꽃』은 그 시간을 조용히 견디는 법을 알려주는 책 같았습니다.

 

이 책은 하루 동안에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 작품입니다.
한강의 언어가 늘 그렇듯,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틈을 포착해 그것을 빛처럼, 향기처럼 우리 안에 남깁니다.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 혹은 세상이 너무 거칠게 느껴질 때
『내 이름은 태양꽃』을 한 번 펼쳐보면 좋겠습니다.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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