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을 기록하는 또 다른 방식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내면 일기’와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고백 대신, 바깥 세계와의 마주침을 기록하며 인간과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책 속에는 병과 죽음, 문학과 예술, 일상의 작은 깨달음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지만, 그것이 모여 한 사람의 깊은 시선을 보여주었습니다.
1. 외면일기는 어떤 일기인가?
보통 일기라 하면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담는 글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외면일기』에서 투르니에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제안합니다. 그는 외면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매일 큼직한 공책에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외적인 세계에 눈을 돌린 일기를 쓰십시오. 그러면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125쪽)
그에게 일기란 자기 고백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응시이자 관찰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장면을 포착해 사진으로 남기듯, 글쓰기도 외부의 순간을 붙잡아 기록하는 작업이라는 것이지요.
2. 왜 병과 죽음에 대해 담담히 기록할까?
책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병을 묘사할 때도 놀랍도록 담담합니다. 심장비대 판정을 받고도 그는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니 기분 좋은 일”이라 말합니다. 그는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하며,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보다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을 예정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오히려 유머러스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노화로 인한 청력 저하에 대해서도 그는 “과연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게 그리 중요한 일일까?”라고 자문합니다. 보통이라면 결핍으로 여길 상황을 오히려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 전환하는 태도에서, 삶을 대하는 투르니에의 독특한 철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3. 문학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투르니에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도 남깁니다. 그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은 프로페셔널의 특권이다.”(74쪽)
즉, 취향과 별개로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독서와 비평을 하는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책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그 안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태도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만, 몸은 말하지 않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97쪽)라고 썼습니다.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이 문장은 문학적 은유이자,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때 얼마나 부분적 단서에만 의존하는지에 대한 반성으로 다가왔습니다.
4. 외면일기는 우리 삶의 변화를 어떻게 기록하는가?
『외면일기』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삶의 전환점에 대한 기록입니다.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삶은 여러 시기들의 연속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병, 이사, 절교 등으로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170쪽)
우리는 흔히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한 장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이 쌓여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바꾼다는 통찰이, ‘외면일기’라는 제목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은 내면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다가오는 사건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5. 외면일기가 던지는 질문?
책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움으로만 바라보는가?
-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말 결핍일 뿐일까?
- 내가 좋아하지 않는 책에서도 어떤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 나의 삶에서도 ‘한 페이지 넘어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수 있을까?
『외면일기』가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자신의 노년과 병, 문학적 사유를 기록하며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이끕니다.
『외면일기』는 저자가 쓴 일기를 그저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한 작가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철학적 기록으로 보입니다. 투르니에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외부 세계를 관찰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책을 읽으며 ‘일기란 반드시 자기 고백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외면을 기록하는 일이 곧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면일기』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큰 영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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