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정신의학자가 쓴 책이다. 저자는 하버드 의대 교수와 미국 대통령 정신건강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겠다.
제일 관심이 컸던 현대의 세뇌에 대한 내용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겨우 30여 페이지 분량으로 다루고 있어 조금 실망했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세뇌’는 뇌를 씻어낸다는 뜻이라 한다. 한자 글자의 뜻을 보니 정말 그렇다. 아픈 기억, 고통스러운 기억을 깨끗이 씻어내 잊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라면 어느 정도 긍정적이겠다. 실제로 1853년 일곱 번째 출산을 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산통을 줄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클로로포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는 스탈린의 여론 조작용 공개 재판에서 보여준 수많은 비정상적인 자백처럼 의도된 대답을 듣기 위한 목적이나 스파이에게서 적의 정보를 빼내기 위한 목적으로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수면을 박탈하며, 극도의 피로를 주고, 집단적 참회 등을 이용한 강압적인 설득에 이용되어 온 것이 문제다.
책 내용의 대부분에서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집단 자살 사건인 ‘천국의 문' 사건과 ‘인민사원’ 사건, 한국 전쟁 같은 전쟁에서 포로들에게 가해진 강압적 설득 등을 공신력 있는 자료의 자세한 인용을 통하여 나열하였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란 점에서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글을 읽어나가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거의 4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술술 읽게 하였지만 그 내용은 무섭고 잔혹하여 알고 싶지 않거나 부인하고 싶은 내용들이다.
개를 이용한 '조건 반사' 실험으로 유명하고 1904년에 노벨 생리 의학상까지 받은 파블로프의 흑역사를 알게 된 것이 충격이다, 자신이 관심 있는 연구를 지원받기 위하여 스탈린과 협력하고 스탈린의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에 사용되도록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세뇌(?)하는 기술을 자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탐욕과 윤리의식의 부재는 그 뒤에도 소련과 미국 등 여러 나라 정보기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부분에서 여러 차례 노출되었다. 세뇌용 약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일군의 사람들에게 본인들 몰래 LSD를 음식에 넣어 섭취하게 하고 반응을 관찰하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범죄인데, 위험성이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같이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조차 본인 몰래 음료에 넣어 섭취하게 하였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가 납치범들에게 납치된 이후 그들의 범죄에 가담하여 경찰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까지 한 페트리샤 허스트의 유죄 여부를 놓고 오랜 기간 계속된 재판 과정과 변호인과 검사 측에 참고인으로 나온 정신의학자들의 논쟁을 길게 다루었다. 그녀의 범죄 행위가 납치범에 의한 세뇌의 결과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범죄에 가담한 것인지 전문가인 저자도 일본 영화 ‘라쇼몽'을 언급하며 판단을 유보하고 양측의 의견 만을 길게 인용하였는데 비전문가인 일반인으로서 진실을 알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21세기의 세뇌를 다룬 2부에서는 ‘뇌 심부 자극기’를 이용하여 고통이나 쾌락을 주고 원하는 행동을 유도한 실험을 소개했는데 무서운 일이긴 하지만 기계를 개인적으로 미세하게 설치하여야 하므로 한꺼번에 대중적 차원으로 실시할 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타게팅 광고의 위험성이나 인터넷 등에서 보고 모방 행동을 하는 것 또는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거짓 광고와 거짓 정보의 급속한 확산을 우려하는 것 등을 다루었지만 일반인들이 이러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방법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정보에 덜 노출되는 것만이 최선인 것 같다.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회색의 그늘이 없는 흑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성급하게 억측하고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찾으며, 자기 믿음과 모순되는 증거는 무시한다.(352)
물론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써 속을 수도 있지만, 사실을 믿지 않음으로써 속을 수도 있다. -쇠렌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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